하나님의성회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신학국장 김은철 목사

 

1914년 창립총회시 등록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128명으로 시작된 하나님의성회는 20086천만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거대한 단체로 발전했다. 20세기초 50여개의 오순절 교단에 속한 교회도 비등하게 발전했다. 선교신학자 데이빗 바렡(David B. Barrett)의 통계에 의하면 1956년에 1천만명이었던 오순절성도들이 1980년에는 51백만명, 그리고 카리스마 운동에 가담한 성도들 14만명이었으며, 1995년에는 464백만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는 신구교 전체를 합한 1939백만명의 약 24%에 해당된다. 1세기안에 구교, 신교, 다음으로 제3의 기독교 단체로 오순절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다. 1600년 역사의 구교, 500년 역사의 신교를 100년 역사의 오순절교가 뒤를 따르고 있다. 데이빋 바렡의 통계에 의하면 2025년에는 811백만명이 될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이 수치는 신구교 전체를 합한 25억명의 약 32%에 해당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성회는 다른 오순절교회와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을 통하여 발전했는데, 한편으로는 참으로 톡특한 네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이단 시비 (Heretical controversy)

 

신교가 그 앞에 있었던 구교에 의해 비난과 핍박을 받았던 것 처럼, 오순절교회도 기존주류교회들로부터 이단 시비에 곤욕을 치뤘다. 특히 장로교에 의해 고난을 많이 받았는데 그들은 공격적으로 교리논쟁과 이단시비를 걸어왔다. 장로교의 발생지인 스코틀랜드나 화란 그리고 한국에서 오순절교회는 오랫동안 고난을 당했다. 한국 오순절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것은 사실 지엽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학의 기초가 부족해서 나온 무지로 비롯되었다. 오순절교회는 상황적인 문제, 문화에 관련된 민감한 문제, 문법적 언어적 문제, 종말론적인 문제 등 심층된 신학적 연구가 요구되는 부분에서 약함을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상대가 관용있는 침례교회가 아니라 배타적인 장로교회이어서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리 없다.

 

장로교 교리 즉 칼빈의 교리는 그 자체의 성격 중 하나가 당파성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도 종종 교리싸움을 한다. 지금 한국에는 장로교회의 교파가 2백개도 넘는다. 인도네시아의 장로교도 분파 투쟁으로 60개도 넘는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본 고장에서도 10개가 넘는다. 필자가 에딘버러 대학 유학 중 어느 한 조직신학 교수가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저는 오순절교회 목사입니다(I am a Pentecostal minister.)라고 말할 때 즉시로 한 대답 - 나는 오순절을 증오합니다(I hate it) - 을 잊지 못한다. 11년동안 40여명의 한국 장로교 목사들이 에딘버러 대학으로 유학하러 왔는데 모두 좋은 사람이었고 교리 시비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장로교 교리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들 중 지금 한국신학계에 잘 알려진 인물들이 여러 명 있다. 필자는 호랑이를 잡으로 호랑이굴에 갔는데 잡지는 못했다. 그 대신 존 칼빈에 앉았던 의자에 앉아 공부하고, 존 녹스가 입던 두루마기와 눌러 쓴 모자(박사학위 가운과 모자)를 가지고 왔을 뿐이다.

 

 

이단 정죄 (Heretical condemnation)

 

이단으로 정죄하려면 정통신학의 핵심교리로 판단해야 한다. 적어도 두 가지로 해야한다. 1996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모임에 속한 GCF(Global Christian Forum)에서 제안된 두 가지 전제 즉,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믿는 것에 동의하면 기독교로 인정하고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WEA(World Evangelical Alliance)에서도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성회나 오순절교단(오직예수는 제외)에서 신봉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가 정통교리에 위배되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믿고 있었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그럼 왜 이단으로 정죄한 것일까? 교리문제보다 감정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오순절교회가 부흥하니까 시기가 나서 이렇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세례 또는 성령충만의 체험이 없으니까 몰라서 그렇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지식의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종종 그런 일들을 하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솔직히 한국 장로교회 목사들은 소위 정통교리를 잘 모른다. 그들은 칼빈의 깊은 신학을 잘 모른다. 칼빈의 신학과 칼빈주의와의 커다란 차이를 잘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경계선을 그어 놓고 그 안에 갇혀 살면서 넓은 공간에 사는 사람에게 이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면 그들은 많은 이단적 요소를 갖고 있는데도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이 말은 필자의 말이기도 하지만 칼빈신학을 전공한 사람의 말이다. 진정으로 성서신학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은 함부로 이단정죄하지 못한다. 모든 신학은 불완전하고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발견하여 판단하면 정죄받지 않을 신학은 없다. 물론 여기에 칼빈신학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칼빈신학을 정통신학의 기준으로 여기고 이단시비하는데 표준으로 삼는다.

 

오순절 인정 (Approval of Pentecost)

 

오순절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반증이다. 세계도처에서 오순절교회가 부흥한다.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교단은 오순절교단이다. 아프리카나 남미에는 오순절교회가 주류교회이며 오순절 간판을 달아야 교회가 잘된다. 한국에는 세계최대의 큰 교회가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오순절교회이다. 한국에서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이 잘 작용하여 장로교가 부흥했고 지금도 부흥한다. 장로교회의 체면을 살린 곳이 한국의 장로교회이다. 전세계에서 두 세 나라 이외에는 장로교회가 소수(minority)이며, 오순절교회는 대다수(majority)이다. 20년전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에서 오순절교회를 가장 보수적이며 가장 복음적인 교회로 평가했다. 가장 보수적이며 가장 복음적이라는 평가에 오순절교회는 자긍심을 갖고 우리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필자는 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신약의 교회이며 그 뿌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날에 세워진 성령충만한 교회에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오순절교회는 교회의 모델이며 패턴이다. 이제는 서로 강단교류를 하고 있으며 오순절교회가 연합사업에 참여해야 일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화해무드에 있는 상황에서 필자는 논쟁할 일감이 없어졌지만, 참으로 좋은 결과이다.

 

 

신교의 오순절화 (Pentecostalization of Protestants)

 

오순절교회의 특성 중 하나는 교회를 오순절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영향으로 어떤 교회는 장로교회인지 오순절교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사실 30년전 오산리기도원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 중에 50%이상이 장로교회 교인이었으며 기도의 목적은 성령충만이 압도적이었다. 다른 교회 성도들은 여의도의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또는 오산리 기도원에서 기도함으로 그들의 영적갈급함을 채웠다. 그들은 마음껏 찬양하고 소리쳐 기도하고 방언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했던 것이다. 기존 교권주의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막을 수 없었다. 교인들이 오순절교회에 갈까봐 금요철야를 새로 정하고 기도회를 뜨겁게 인도한다. 목사가 안수기도하고 방언기도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비오순절교회에서도 종종 볼수 있다. 그 전에는 금기사항이었다. 장로교회계통에서 먼저 찬양과 경배를 조직적으로 대대적으로 시도하고 보급하므로 오순절화하는 일을 앞당기게 하는 큰 공헌을 하였다.

 

네 단계의 의미 (Significance of these four stages)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성령충만함으로 나타나는 역사이다.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며, 기사와 이적 그리고 병고침과 축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에 있는 교권과 대치되어 네 단계를 통과하게 된다: 이단 시비, 이단 정죄, 오순절 인정, 오순절화. 중요한 것은 이 네 단계를 쌍방이 함께 통과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1) 전자가 후자를 이단 시비걸고 이단으로 정죄하나 결국 오순절을 인정하고 오순절화되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이 네 단계를 거쳤다. 한국 장로교회도 이 네 단계를 거쳤다. (2) 후자가 전자에게 이단 시비당하고 이단으로 정죄당하지만 결국 오순절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후자를 오순절교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순절교회는 주류장로교회의 말씀의 검으로 찔리고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더 건전한 성서적인 성령운동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 과정속에서 장로교회는 성령을 체험하게 되어 오순절적인 교회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의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네 단계는 지났지만, 부분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네 단계 중 어느 단계를 거치고 있는 중에 있을 것으며, 대부분 세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번째 단계에서 언제까지 머물어 있을지 모르지만 네 번째 단계에 반드시 도달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거절할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