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국 소식
제12장 신유
신유는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속죄 안에 마련된 것이며, 모든 신자들의 특권이다(사 53:4, 5; 마 8:16, 17; 약 5:14-16).
[하나님의성회 근본교리진술 제12조]
1. 신유의 이해
신유의 어원
신유라는 단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병을 고치신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구약에 나타난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에서 신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세 가지의 단어가 있다. (1) ‘아룩하’는 건강을 회복하다는 의미로 치료, 고침, 회복, 병이 점점 나아짐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2) ‘말페’는 치유와 고침(렘 14:19)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원기회복이란 뜻도 포함된다. (3) ‘라파’는 “치료하다”, “상처를 고치다”(창 22:17; 욥 5:18), “치료받다”(레 13:37; 사 64:5) 등을 말한다.
신약에는 “치료”라는 단어로 번역된 여러 헬라어 단어가 있다. (1) 헬라어의 어원에서 거의 의학적인 용어로만 사용되는 ‘이아오마이’는 “병을 고치다”, “치료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소조’는 고전 헬라어에서 의료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상하지 않게 지키다”, “구제하다”, 또는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3) ‘테라퓨오’는 “병자를 돌보다”, “치료하다”, “고치다”, “낫게 하다”는 뜻이 있다.
예수의 신유사역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다음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 예수는 그의 사역의 많은 부분을 치유사역 하시는 데 할애하셨다. 이는 병든 자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며, 복음의 능력을 치유를 통해 보여줌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전인 구원의 목적을 지닌 것이다.
예수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하나님의성회의 신학자 레슬리 홀드크로프트(Leslie Thomas Holdcroft)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열 가지 경우와 개인적으로 고치신 스물일곱 가지 경우의 신유의 기적을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은 귀신 들린 자, 질병, 사고, 심지어 죽음 등 다양한 인간의 질병을 고치셨다. 예수는 치유를 통해 자발적이며 신실하게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으로 자신을 제시하셨다.”1)
(1) 눈먼 두 소경(마 9:27-31)
(2) 벙어리 귀신들린 자(마 9:32, 33)
(3) 귀 먹고 벙어리 된 자(막 7:31-37)
(4) 소경(막 8:22-26)
(5) 과부의 아들의 죽음(눅 7:11-16)
(6) 등이 굽어진 여인(눅 13:11-17)
(7) 고창병든 사람(눅 14:1-6)
(8) 열 명의 한센병자(눅 17:11-19)
(9) 대제사장의 하인의 귀(눅 22:50, 51)
(10) 왕의 신하의 아들(요 4:46-54)
(11)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요 5:1-15)
(12)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요 9:1-38)
(13) 나사로의 죽음(요 11:1-45)
(14) 가버나움회당의 귀신들린 자(막 1:23-27; 눅 4:33-36)
(15) 백부장의 하인(마 8:5-13; 눅 7:1-10)
(16) 눈 멀고 벙어리 귀신들린 자(마 12:22, 23; 눅 11:14)
(17)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마 15:21-28; 막 7:24-30)
(18) 막달라 마리아(막 16:9; 눅 8:2)
(19) 한센병자(마 8:2-4; 막 1:40-45; 눅 5:12-15)
(20) 베드로의 장모(마 14:15; 막 1:29-31; 눅 4:38, 39)
(21) 군대 귀신들린 자(마 8:28-34; 막 5:1-20; 눅 8:26-39)
(22) 중풍병자(마 9:2-8; 막 2:1-12; 눅 5:17-26)
(23) 혈루병 여인(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24) 야이로의 딸의 죽음(마 9:23-26; 막 5:35-43; 눅 8:49-56)
(25) 회당에 손 마른 자(마 12:9-13; 막 3:1-5; 눅 6:6-11)
(26) 귀신들린 아이(마 17:14-21; 막 9:14-29; 눅 9:37-43)
(27) 소경 바디매오(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것 중에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일곱 번, 친구들이 데리고 온 병자를 치료하신 것이 열한 번, 병자를 직접 고치신 것은 여섯 번, 멀리서 치료하신 것은 세 번이다. 예수는 직접 손으로 만지시면서 여덟 명을, 말씀으로 일곱 명을, 침을 뱉고 만짐으로 세 명을 고치셨고, 나머지 한 명은 점차적으로 고치셨다.2)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유사역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이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베드로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치유를 행하였는데, 병 고치는 것을 주로 하는 표적과 기사는 전도의 필수요건이었다. 열두 사도 중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았다. 베드로는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함으로 앉은뱅이는 걸으며 뛰였다. 베드로의 신유의 사역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는 솔로몬 행각에 모인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고, 예루살렘 근읍에서 온 수많은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다 고쳤다(5:12-16). 하나님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빌립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8:5-8). 다메섹 도상에서 개종된 바울도 신유의 이적을 행하며 전도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시대의 신유사역은 복음을 전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서 많은 신유사역이 이루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1)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킴(3:1-10)
(2) 많은 사람의 병이 나음(5:12-16)
(3) 기사와 이적(6:8)
(4) 사마리아에서의 축귀와 병고침(8:5-8)
(5) 애니아의 중풍을 고침(9:32-35)
(6) 다비다가 죽음에서 일어남(9:36-42)
(7)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고침(14:8-10)
(8) 특별한 이적(19:11, 12)
(9) 유두고의 살아남(20:7-12)
(10) 멜리데 섬의 기적(28:8, 9)
치유의 종류
치유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영적 치유: 죄인이 구원받아 영혼이 치유받는 것(마 1:21; 13:15; 9:12; 시 41:4)
(2) 육신 치유: 몸의 질병이 치유받는 것(마 4:23; 고전 12:9; 약 5:16)
(3)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 사람의 마음이 치유받는 것(눅 4:18, 19; 마 12:20)
(4) 축사 또는 축귀: 귀신을 쫓는 것(막 16:17; 눅 10:19; 행 10:38)
(5) 죽은 자를 살림(왕상 17:22; 마 9:18-24; 요 11:43, 44; 행 9:36-40; 행 20:9, 10)
2. 복음의 중요한 부분
구약
신유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므로 보여주셨다(출 15:26; 시 103:3). 또한 신유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강한 히브리 어조로 되어 있는 이사야 53장 4절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질고”란 단어(대하 16:12; 21:15, 18, 19; 사 38:9)는 육체적 병과 질병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와 똑같다. “슬픔”은 욥 33장 19절에서 육체적 고통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와 똑같다.]
이사야는 그의 고난을 그의 치유사역과 연관시킨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치료가 우리에게 임했다]”(사 53:5). 이사야 53장 6절의 본문과 베드로전서 2장 24, 25절에서 이 적용은 특별히 치료나 죄로부터의 구속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4절에 나타난 육체적 질병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구절들은 우리의 죄와 고집으로 인한 영적 육체적 결과들로부터의 치료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복음서는 예수의 신유사역과 그분의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사역 간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치료하시는 그분의 능력은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의 권세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이다(막 2:5-12). 그분의 치유의 기적이 복음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과 평행을 이루며 긍휼하심을 나타낸다(마 4:23; 9:35, 36). 사방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도 받는다(눅 5:15; 6:17,18). 그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아픔, 질병, 불구, 장애, 상처 등을 치료하시며(마 15:30, 31; 21:14),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다(마 12:15; 14:14).
또한 예수는 사람들이 스스로 초래한 문제들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마 4:24). 예수는 종종 질병이 죄의 결과이거나(요 5:14) 사탄의 활동에서(눅 13:16)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아셨다(요 9:2,3).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될 때도 있었다(막 2:12).
신유는 복음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중요한 증거이다(사 61:1, 2; 눅 4:18; 7:19-23). 세례 요한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예수가 실제로 약속된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선구자인지 의문을 갖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질문할 때, 예수는 기적들과 복음 전파가 병행되는 메시아적 사역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응답하셨다. 신유를 통해 예수는 성부의 계시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렸다(요 10:37, 38).
사도행전
신유는 사도들의 사역과 초대교회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복음의 필수적 요소였다. 예수는 12명의 제자와 70인을 보내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라고 하셨다(눅 9:2; 10:9). 오순절날 후에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누가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해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이 계속적으로 진행됨을 보여준다(행 1:1, 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약속은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의 성품과 목적에 순응함으로써 그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요 14:12-14). 하나님은 빌립 집사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게 하셨으며(행 8:5-7),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바울)을 고치셨다(행 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치유사역을 지지한다(막 6:13; 9:38, 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끼치기 위해서 성령이 나타내 보이시는 일들 가운데 포함되며(고전 12:7),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증거를 나타내신다(고전 12:3).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보듯이 신유는 주변적인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3. 속죄 안에서 마련된 것
구약의 속죄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물의 피뿌림을 통해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한다. 구약의 속죄는 대부분의 경우에 구속이나 회복을 위해 치르는 속전을 필요로 한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언약궤의 위에 놓인 순금 덮개인 속죄소 위에 속죄물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간다.
속죄는 형벌과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을 가져옴으로써 하나님의 복과 은총을 회복시켜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따른 판결이 임한 후에 백성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러자 모세가 아론을 백성들 가운데로 보내어 그들을 위해 속죄할 때 염병이 그쳤다(민 16:47, 48).
이스라엘 남자들을 계수할 때 그들이 속죄를 위한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서 역병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 30:12, 15). 그러므로 속죄는 질병을 포함한 죄의 결과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신약의 속죄
그리스도의 속죄 가운데는 죄뿐만 아니라 질병을 담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마태복음 8장 16, 17절은 이 사실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의 하나로서 신유를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속죄는 십자가의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다(요 3:14-16). 거기에서 그분은 전인을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속죄와 동일한 의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과 죄의 용서를 받았다(롬 3:24; 엡 1:7; 골 1:14; 히 9:15). 다시 말해서 속죄는 죄의 결과를 대비하는 것이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죄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속죄 안에 마귀의 일을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요일 3:8).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가 아직 몸의 속량을 얻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탄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롬 8:2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얻는다(고전 15:42-44, 51-54). 이 새로운 몸은 몸의 구속을 의미한다(롬 8:23).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몸의 구속이 완성된다.
4. 모든 신자의 특권
구원이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얻어지는 것 같이(엡 2:8), 하나님의 모든 복과 은사들은 예수의 은혜와 공로로 신자에게 주어진다. 신유는 신자들의 권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부여된 은혜로운 특권이다.
모든 신자의 의사이신 예수
하나님은 위대한 의사이시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을 치료하셨으며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사 왕은 병이 있을 때에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대하 16:12). 아사 왕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시리아의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거부했다(대하 16:7). 중요한 것은 그가 의원들을 찾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기를 거절하였다는 데 있다.
예수도 위대한 의사이시다. 예수는 열 명의 한센병자들을 고치셨다. 그리고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눅 17:14).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들은 진단과 검역과 건강을 관리하고 있었다(레 13:2이하; 14:2이하; 마 8:4). 그러므로 예수는 전문의들의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인정하셨다.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치료가 즉각적이든지 점진적이든지(막 8:24) 신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오늘날에도 예수는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신다.
신유의 은사
신유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성령의 나타나심들 가운데 들어 있다(고전 12:4-11, 28-30).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은사는 신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시행되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이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지 않는 것과 같이, 신유의 은사는 이 은사의 수혜자를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의 말씀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주어지는 것과 같이, 신유의 은사도 각 개인의 질병의 치료를 위해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는 신유에 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볼 따름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야고보를 순교하게 하시고 베드로를 구원하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료받고 다른 사람은 치료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역할이 말씀을 전파하고 그에 따르는 표적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치료의 수단: 기도와 믿음
기도는 치료의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야고보서 5장 15절은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약속한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음으로 치료를 얻는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내가 행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요 14:12-14; 16:23, 24). 그런데 그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계시이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 우리에게 해결이 있다(요 15:7).
믿음은 신유의 특권을 주장할 수 있다. 혈루증으로부터 고침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막 5:34)라고 말씀하셨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앉은뱅이가 복음을 듣고 그 마음 속에 병 고침에 관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일어서라고 명령했다(행 14:9, 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세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마 8:5-13)과 부스러기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수로보니게 여인(막 7:24-30; 마 15:28)에게서 위대한 믿음이 보인다. 신유가 믿음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나사렛(막 6:5, 6)과 변화산 아래(마 17:14-20)에서 불신앙이 신유의 나타남을 방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 예수는 믿음이 나타내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의 필요를 지적하셨다(막 9:29).
그런데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연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은 종종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예수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도우셨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손대셨고(막 1:41; 8:22), 손을 잡으셨으며(막 1:31; 눅 14:4), 안수하기도 하셨다(막 6:5; 8:25; 눅 4:40; 13:13).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행동으로 도움을 주셨는데, 그들 가운데는 믿음이나 순종을 필요로 한 사람도 있었다(막 7:33; 8:23).
어떤 사람은 그분에게 손대는 것이나 그분의 옷이 믿음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막 3:10; 5:28; 6:56; 눅 6:19). 베드로의 그림자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행 5:15).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그런 효력을 나타냈다(행 19:12). 그러나 믿음은 수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4절도 같은 종류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병든 자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신유를 일으키는 것은 기름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건강에 대한 책임과 부활의 특권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한 규칙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신유를 기대하면 안된다. 예수는 제자들이 군중들 사이에서 빠져나와서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셨다(막 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는다면 지쳐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출 18:18).
신유는 노쇠의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모세는 죽는 날까지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신 34:7). 그러나 이런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 1:1-4). 전도서 12장 1-7절에 생생하게 묘사된 노년의 점진적 쇠약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신유는 노인에게도 여전히 해당되지만 치료된 부분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계속해서 쇠퇴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입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육체를 위해 무엇을 하든지, 얼마나 자주 치료되든지 간에,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롬 8:10). 성경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참 소망이므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롬 8:11). 사실상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 그러나 결국 육체의 몸이 부활하여 다시 살 것이다(롬 8:11).
5. 안수기도
병자에게 손을 얹는 것은 초대교회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예수는 치유하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가끔 손을 얹었다(막 6:5; 눅 4:40; 13:13).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8)라고 말씀했다. 바울은 병자에게 손을 얹었으며, 그 후 병자는 치료를 받았다(행 28:8).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인 절차는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면 그들이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약 5:14-16).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신약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관련하여 기름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도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고쳐준 적이 있다(막 6:13).
신약시대에는 기름이 흔히 치료약으로 시용되었다(눅 10:34).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기름을 바르고 안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물이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기름을 바르는 행위 그 자체가 치유의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치유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다(슥 4:4-6).
하나님의성회에서 우리들은 안수를 하거나 기름을 바르는 것이 치유를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믿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기도를 하는 사람의 만짐과 기름을 바르는 것은 믿음을 격려하는 것이며, 성경은 그것을 시행할 것을 분부하고 있다(약 5:14-16).
연구문제
1. 신유의 어원적 의미는 무엇인가?
2.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열 가지의 경우는 어느 구절에 있는가?
3. 예수의 신유사역과 사도들의 신유사역을 어떻게 대조할 수 있는가?
4. 신유는 왜 중요한가?
5. 신유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6. 교회 안에 신유가 준비되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7. 신유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