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

 

신자들의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육체적 증거로 입증된다( 2:4). 이런 경우에 방언을 말하는 것은 방언의 은사와 본질상 같지만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고전 12:4-10, 28).

[하나님의성회 근본교리진술 제8]

 

1. 방언의 이해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는 방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것은 헬라어 글롯사(언어)와 라리아(말하기)와의 합성 형태이다. 방언은 언어로 말하다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방언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1) 다른 방언들로 말함( 2:4)

(2) 방언들을 말함( 10:46; 19:6; 고전 12:30; 14:5, 6, 18-19, 23)

(3) 한 방언을 말함(고전 14:2, 4, 13)

(4)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을 말함(고전 13:1)

(5) 새 방언들을 말함( 16:17)

(6) 여러 종류의 방언들(고전 12:10, 28)

(7) 방언들은 믿지 않은 자를 위함(고전 14:22)

(8) 내 영이 방언으로 기도함(고전 14:14, 19)

(9) 예배 때 방언으로 기도함(고전 14:26, 27)

 

사도행전의 방언을 말함(글롯사 라리아 혹은 글롯사 라레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할 때 이 단어와 몇 가지 변형된 단어들과 함께 등장한다. 이 두 단어로 된 헬라어는 다른 정경 문서나 비정경 문서의 어디에서도 사람이 성령(혹은, 어떤 영)의 감동에 의해서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누가와 바울이 언급하는 방언의 현상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2. 방언에 대한 네 가지 해석

 

방언의 성격에 관해 네 가지 해석이 있다. 다른 견해들이 제시될 때까지는 이 학파들의 주창자들의 기본 입장에 대한 이해에 머물러야 하며, 개인적 관점들의 다양성은 최소한도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들을 수 있는 기적

 

이 견해는 주로 사도행전 24절의 다른 언어들(방언들)에 관련이 되며, 4절의 말하기가 아니라 26, 8, 11절의 듣기에 강조한다. 누가는 그 기적이 말하는 사람들의 혀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귀에 있다고 단언하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1)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오순절날의 방언은 성령에 의해서 듣는 신자들에게 즉시 내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서 자신들의 토착어로 전환되었다2)고 말한다. 막스 터너(Max Turner)는 오순절 사건이 백 이십 명의 믿는 자들 안에서 일어난 활동이라고 반응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누가는 하나님께서 안 믿는 자들 속에서 방언 통역의 더 큰 기적을 행하신 반면에, 그 제자의 무리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는 암시는 없다고 한다.3)

 

의미 없는 황홀경의 소리

 

이 견해는 신약의 방언을 비기독교인이나 이교도 세계의 유사한 현상들과 연관시킨다. 말하는 자들이 무아지경과 같은 상태에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지지자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은 언어를 사용해서 앞뒤가 맞지 않고 의미없는 소리를 낸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이런 황홀경의 발언의 유형을 고린도 교인들의 것으로 돌리며, 이런 이유로 바울이 방언 통제를 언급한 것이라고 말한다.4) 만약 이 견해가 옳다면 성경이 어떻게 방언을 성령의 선물로서 제시하는지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옹알거리듯이 불명료한 소리를 내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간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동사 라레인이 옹알거리는 것 같은 불완전한 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울이 예언을 말하는 것(고전 14:29) 그리고 여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고전 14:34, 35)에 관련해서 이 단어(라레인)를 사용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기에 관련해서도 같은 이 단어(라레인)를 사용했다(고전 14:39).

 

고어적 표현들

 

리들과 스콧(Liddell and Scott)의 헬라어-영어사전에서는 글롯사(언어)의 의미를 설명이 필요한 사어(死語) 혹은 외국어라고 제시한다. 바우어-안트-징리치-당커(Bauer-Arndt-Gingrich-Danker) 사전은 방언의 현상에 대해 비슷한 의미를 제안한다. 이와 관련해서 잠복 기억(cryptomnesia)이란 개념이 있는데, 이는 황홀경이나 극도의 흥분 상태 혹은 심지어 술취한 상태에서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어 단어나 구절을 무심코 입밖에 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기억 저장소에 들어 있던 것이다. 시릴 윌리암스(Cyril G. Williams)는 오순절의 방언을 주석하면서 제자들이 낸 소리는 유대인 청취자들에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확인할 수 있는 단어들5)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이 여기 저기 내뱉어진 발언들이 실제로 확인 가능한 말들이었을 것이다6)라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법이 아무리 장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방법으로 은사를 다루는 모든 성경 자료들을 어떻게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오히려 글롯사(언어)의 드문 용법을 취하여 억지로 적용시킨 것이다.

 

언어

 

신약학계에서 아마도 가장 널리 수용되는 견해는 방언이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각종 방언(고전 12:10, 28)을 언어들의 종류라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로 인해서 견지된다.

 

(1) 헬라어 글롯사(언어)가 시적이거나 고어체의 표현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글롯솔라리아(방언)와 관련해서는 분명히 언어적인 것이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에서 언어의 혼잡에 관한 이야기( 11:1, 6, 7, 9)에서 사용되는데, 히브리어 라숀(lashon)의 번역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창세기 11장의 흩어짐 이후에 지상의 여러 종족들에 의해 쓰이는 언어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사파(saphah)( 10:5, 31)를 번역하는 데에도 쓰인다. 이 단어와 확실히 들어맞는 한 구절이 이사야서 2811절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 바울이 이것을 고린도전서 14 21절에서 인용한다(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2) 또한, 헬라어 헤르메네이아와 그 동족어들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글롯사에 해당하는 언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사 헤르메뉴오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해석하다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와 이 동족어는 외국 단어나 표현의 의미를 소개하는데 사용된다( 5:41; 15:34; 4:36). 그러므로 헤르메네이아와 이 동족어는 청취자나 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언어에 대한 번역이나 해석의 개념을 지닌다.

 

방언 통역의 은사의 개념은 글로솔라리아(방언)의 성격에 따라 수용된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헤르메네이아 언어군의 용법은 바울이 언어의 번역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언어들의 성격은 무엇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확인이 가능한 인간의 언어이거나 인간이 아닌 천사나 하늘의 언어일 것이다.7) 어떤 사람들은 누가의 설명(인간의 언어)과 바울의 설명(천사나 하늘의 언어)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고, 결과적으로 어느 하나를 가지고 다른 것을 해석하려고 한다.

 

3.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로서의 방언

 

사도행전 2 4절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든()이란 단어가 두 개의 주요 구절의 주어라는 사실이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라.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모두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예외없이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 아래의 다섯 가지 사건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게 방언을 그 수령자들의 성령세례와 연관시킨다.

 

오순절날의 제자들( 2:1-4)

 

오순절날에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2:4). 이 구절에서 시작하다(아르코마이)는 하나의 용법 즉 여분의 조동사로 불리는 용법으로서, 논리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표현 방법이지만 강조나 수사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나 일부 다른 언어의 문법상 특이한 경우이다. 원래의 의미는 부정사 말하다가 직설법임으로, 그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이지만, 이 용법을 사용하여 그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는데, 시작했다는 말을 추가하므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을 수사학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도행전 2 4절의 방언(글로솔라리아)은 확실히 인간의 언어(제노랄리아)를 말한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인 것이다. 제자들의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2:11) 있었다. 그들이 신적으로 영감된 언어로 길게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발언은 찬양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감사였다.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많은 대표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제자들이 말하는 방언 속에서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위임명령( 1:8)의 전조를 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정된 것이었다. 비록 세상의 모든 국가들이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누가가 그 목록에 셈, , 야벳의 후손들을 포함시켜서 창세기 10장의 것에 비교될 만한 국가들의 목록을 제시한 것이다.

 

사마리아인들( 8:14-20)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행한 기적들(축사, 치유)을 목격했고,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에 믿음으로 응답했고, 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 누가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내리신 일이 없었다(8:16)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사마리아인 신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기도에 의해서 성령체험을 했다는 것이다(8:17). 이 경우에 매우 특이한 일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무언가 극적인 일이 없었다면 어째서 시몬이 그러한 은사를 부여할 권능을 원했을까? 그는 이미 회심 전부터 마술을 행했으며, 빌립의 사역에 수반되는 특이한 기적들을 목격했다. 그가 그토록 과도하게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누가는 이렇게 말한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았다(에이돈)(8:18). 이 헬라어 동사는 신약성서에 자주 나오는데, 기본적 의미는 본다는 것이지만 감지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했을 때 눈에 띄는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데 의문에 여지가 없다. 그것은 너무 특이해서 시몬조차 유별나게 감동을 받았다. 그의 주목을 끌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방언의 독특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2장과 10)에서 방언과 성령세례를 분명히 동일시한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누가가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방언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만약 방언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방언 이외에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몇 명의 비오순절신학자들은 이 사건에서 방언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소의 사울( 9:17)

 

아나니아의 안수의 한 가지 목적은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9:17)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도 방언과 최초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개인들을 명백하게 연관시키는 두 가지 주요한 이야기 사이에 놓여 있다. 누가는 바울의 성령세례에 관해 더 이상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이 규칙적으로 자주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그의 방언기도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넬료의 사람들( 10:44-48)

 

이 이야기에 관해 몇 가지 분석이 필요하다.

 

(1)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의 경험과 오순절날의 제자들의 경험을 분명히 동일시한다. 하나님이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다( 11:17).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15:8) 성령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 받음, 부으심, 선물과 같은 용어들이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모두 나온다.

 

(2) 방언의 외적이며 관측 가능한 현상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높임을 들었기(10:46) 때문이다. 방언은 이방인의 성령세례의 증거 혹은 표시였다.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동료들에게 성령이 실제로 이방인들에게 임하셨음을 증언했다.

 

(3) 이방인들은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메갈루노].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높였다]는 것은 그들이 방언으로 말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종종 선행하는 말에 대한 설명문을 이끌며, [다시 말해서][카이의 설명적 보어의 용법으로 불리는]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 , 하나님을 찬양했다[높였다]. 동사 메갈루노의 관련된 명사 형태가 사도행전 211절에 나오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메갈레이아]을 듣는다라고 말한다. 이 동사는 마리아의 찬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메갈루노]와 사도행전 1917절에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메갈루노]에도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방언은 다른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나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14:2, 14, 15).

 

에베소의 제자들( 19:1-7)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19:2)고 질문했을 때 그것은 무슨 의미였는가? 성령 받음에 관한 이 문제는 에베소 사람들이 믿었을 때에 실제로 성령을 받았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는 언급이다. 결국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기 시작했다(19:6).

 

에베소 사람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구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모두 방언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일부 사람은 방언을 했고 다른 사람은 예언했으며, 따라서 방언이든지 예언이든지 둘 중 하나의 체험이 따랐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번역을 제안할 수 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그들은 방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예언도 했다.

 

고전적 오순절주의의 최초의 증거의 교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에만 적용된다.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적 요소라는 오순절주의의 견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인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저술에서 기대하지 않는 지지의 글이 발견된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의 오순절은 기독교의 최초의 오순절과 같이 황홀경의 방언의 특징을 갖는다는 것은 정당한 가정이다.8)

 

요약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최초의 육체적 증거”에 관한 오순절주의의 교리는 성경연구를 통해서 입증되었다. 이 용어는 물론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성령세례를 받을 때 신자가 방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요약한 하나의 시도이다. 이것은 방언이 즉각적이고 경험적으로 성령세례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사고를 전달한다.

 

이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의할 점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 최초의 증거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강조는 쉽게 성령의 표적과 은사를 혼동하도록 이끈다. 방언의 현상은 성령의 사역의 오순절적 차원의 증거이지만 은사 그 자체는 아니다. 올바로 이해한다면 방언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것이다.9) (2) 최초의 증거는 우리가 성령을 갖고 있다는 표시이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이 우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3) 방언이 단지 최초의 증거이지만 적어도 방언 외에 또 다른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고 어떤 오순절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최초의 증거의 교리에 대해 강력한 반대자인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Frederick Dale Bruner)는 이 문제에 대하여 책임 있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입장을 정확히 대변한다.11)

 

4. 방언의 목적과 사용

 

신약성서에 의하면 알지 못하는 방언에는 네 가지 목적 혹은 사용이 있다: (1)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로서( 2:4; 10:46; 19:6), (2) 방언이 통역될 때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로서(고전 14:2-12), (3)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으로서(고전 14:33), 그리고 (4) 효과적인 기도와 찬양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로서(고전 14:2-4, 15). 이 모든 경우에 방언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지만 그 목적은 다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충만한 능력으로 임하실 때 나타나는 최초의 외형적이며 가시적 표시라는 말이다. 오순절날에 약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방언을 말했으며( 2:4),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할 때, 믿는 유대인들이 놀랐으며(10:44-48), 에베소의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 19:1-6). 바울도 성령충만을 받아 누구보다도 자주 방언을 말했다(고전 14:18).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성령이 주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방언으로 말을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그 방언의 의미를 풀이한다. 이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교회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도록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해 준다.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 14:2-12).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

 

오순절날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아 방언하게 되었다. 이 때 로마제국에 퍼져있던 유대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그들은 제자들이 여러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다. 15개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각각 그들이 사는 지방의 언어로 듣고 매우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다. 믿지 않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 14:22).

 

효과적인 기도와 찬양의 도구

 

개인의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와 찬양하는 것은 성령의 또 하나의 사역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방언으로 기도와 찬양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생활을 매우 부요하게 만든 증거이다. 성령이 신자의 영혼을 감동시키실 때 이성의 한계는 극복된다. 성령이 주시는 언어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영혼의 감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많은 것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성령과 신자가 신령한 예배의 영광 가운데 모두 함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구문제

 

1. 방언의 정의는 무엇인가? 두 가지만 쓰시오.

2. 방언이 의미 없는 황홀경의 소리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변론할 것인가?

3.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는 방언인가? 다른 증거는 없는가?

4. 표적 방언과 은사의 방언은 어떻게 다른가?

5. 믿지않는 사람에게 유익한 방언은 어떤 방언인가?

6. 개인적으로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7. 방언의 은사 외에 다른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가? 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