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성령세례

 

모든 신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아버지의 약속, 즉 성령의 세례를 기대하고 구할 권리가 있으며 그래서 간절히 기대하고 진지하게 구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일반적인 체험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들리는 표현을 주심에 따라 다른 방언(배우지 않은 언어)을 말하는 최초의 육체적 표적이 동반된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삶과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가 나타나며, 은사수여와 은사사용이 목회사역에 나타난다( 24:49; 1:4, 8; 고전 12:1-31). 이 체험은 새로 태어남의 체험과 다르며 새로 태어남에 이어지는 것이다( 8:12-17; 10:44-46; 11:14-16; 15:7-9). 성령세례를 받으면 다음과 같은 체험이 나타난다: (1) 성령의 흘러넘치는 충만( 7:37-39; 4:8). (2) 하나님께 향한 깊은 경외심( 2:43; 12:28). (3) 하나님을 향한 강한 거룩함과 그의 사역에 헌신함( 2:42). (4)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위한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사랑( 16:20).

[하나님의성회 근본교리진술 제7]

 

1. 성령세례의 용어

 

사도행전은 성령에 관해 70번 이상 기록하고 있으며, 성령이 사람들과 만나는 예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세례의 특별한 용법을 알려면 이 책을 연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래와 같은 표현들이 상호 연관적으로 사용되었다.

 

(1) “성령으로 세례받다”( 1:5; 11:16). 이 용어는 하나의 은유로서 성령 안에 잠기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사복음서에서도 나타난다( 3:11; 1:8; 3:16; 1:33). “성령세례란 표현은 “성령으로 세례받다”는 말의 명사적 표현인데, 신약에 나타나지 않지만 동일한 표현의 편의성 때문에 자주 사용된다.

 

(2) “성령의 오심혹은 성령의 임하심”( 1:8; 8:16; 10:44; 11:15; 19:6; 1:35; 3:22). 이 용어에는 공간적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이 (위치상에서) 도래하는 모양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아마도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생생한 방식”이다.

 

(3) “성령의 부으심”(2:17, 18; 10:45). 이 용어는 요엘서 228-29절에서 사용되었다. 이사야서 3215절에서는 위로부터 부음으로 표현되고, 443절에서는 나의 신을 부음으로 표현되는데, 비록 똑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동일한 개념이다.

 

(4) “아버지의 약속”(1:4). 아버지는 약속을 주셨으며, 또한 그 약속의 원천이시기도 하다.

 

(5) “성령의 약속”(2:33, 39). 성령은 약속이시다. 그는 “약속된 성령”( 1:13)이시다.

 

(6) “성령의 선물”(2:38; 10:45; 11:17). 성령은 선물이시다.

 

(7) “하나님의 선물”(8:20). 이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8)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다”(2:4; 9:17; 참조 눅 1:15, 41, 67). 이 용어는 누가의 저작에서 자주 사용된다. 바울의 서신( 5:18)에 있는 이 말은 성령의 최초의 충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령충만이라고 널리 사용되는 명사적 표현이 성경에 없지만, 동사적 표현 대신에 편의상 사용되고 있다.

 

(9) “성령 받음”( 8:15-20; 10:47; 19:2; 11:17; 15:8). 이 용어는 오순절날의 성령충만과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이 용어가 다양하다는 사실은 어떤 하나의 용어도 그 표현만으로 모든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용어들을 문자적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자들은 독자가 그 표현의 성격과 의미를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그것을 은유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세례받음, 성령충만, 성령의 부으심 등의 표현들을 수량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령 안에 잠기는 것(성령의 외적 임재)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성령의 내적 임재)을 조화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이 표현들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고 압도되는 경험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은 이전에는 신자에게 성령의 활동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내주하신 성령이 새로운 차원으로 사역하신다는 것이다.

 

2. 아버지의 약속

 

예수는 구하는 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11:13). 이 약속은 그들이 회당이나 종교 당국자들 앞에 끌려갈 때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라는 언급과 관련이 있다( 12:12).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란 표현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약속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020절의 평행구절(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하신 성령의 약속은 오순절날에 이르러서야 성취되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의 표현으로 “성령의 약속”( 3:14)과 “약속의 성령”( 1:14)을 사용했다. 이 약속에 관련된 여러 구약의 구절들이 나타난다( 32:15; 44:3-5; 11:19, 20; 36:26, 27; 37:1-14; 39:29; 12:10). 이 구절들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의 임하심은 서로 연관된다.

 

성령의 부으심에 관한 요엘의 예언( 2:28-32)이 아버지의 약속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의 이야기에 대한 주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령의 부으심과 요엘의 예언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2:17-21).

 

성령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약속이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성령세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차원에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약속이다. 오순절날에 신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을 때에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사도들만이 아니라 그 곳에 모인 120명이 모두 다 성령충만을 받았다. 그 다음에 사도 베드로는 술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를 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2:38). 그리고 그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9)라고 말했다.

 

3. 중생에 수반되는 체험

 

신자를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되는 뚜렷하고 확인이 가능한 카리스마적 성령체험이 있는가? 오순절주의자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사도행전에서 신자가 되는 것과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 분리된 사건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에드어드 슈바이쩌(Eduard Schweizer)사도행전 238절에 따르면 성령은 이미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부여된다1)고 논평했다. 카리스마적 체험을 얻은 제자들의 첫째 사례는 오순절날에 일어났다( 2:1-4). 누가는 오순절날 제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중생한 자들이 최초의 성령체험을 가진 네 가지 다른 사례들을 연관시킨다(8:14-20; 9:17; 10:44-48; 19:1-7). 이 체험에 대해 다섯 가지 사례들을 개관하고 연구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오순절날( 2:1-4)

 

오순절날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이 성령의 강림은 요엘에 의해 예언되었고( 2:28, 29), 승천하신 예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2:33). 막스 터너(Max Turn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반적으로 사도행전의, 구체적으로는 누가의 성령론의 [범례]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2장은 요엘의 약속을 인용한 말에 달려 있다.2)  다시 말하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성령체험의 범례적 사건이다. 범례는 일종의 양식이므로 오순절 사건은 이후의 성령의 부으심이 따르게 될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3)

 

제자들의 오순절 체험이 그들의 중생에 후속적인 것인가? 만약 이 제자들이 성령의 부으심 이전에 죽었다면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반대의 논증을 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10:20). 신약에서 나타나는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오순절날 이전에 중생을 체험했다.

 

사마리아의 오순절( 8:14-20)

 

사마리아인 회심자들의 체험은 후속성의 교리를 잘 예증하는 사건이다. 이 본문이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분명한 증거이지만 비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답변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을 위해서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8:16)고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8:14)는 것을 들었다고 누가는 말한다. 이 표현을 연구하면 진실한 회개와 일치됨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 41절에서는 베드로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시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의 회심을 말하는 사도행전 11 1절과,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사도행전 17 11절에서도 나타난다. 그 다음 구절은 이 사람들의 믿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제에 관한 누가의 용어와 바울의 용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받음은 은사체험을 가리키는 반면에,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주로 구원체험과 부합되는 것이다. 누가는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소의 바울( 9:17)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9:1-8; 22:4-11; 26:12-18). 삼일 후에 그가 경건한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았는데,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고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9:17).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사울의 회심체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입장은 최초의 성령세례가 중생체험의 한 요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이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이 아니라 다메섹 시내에서 회심했다는 견해를 반대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논평과 설명이 적절하다.

 

(1) 사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예수를 만난 회심의 체험이며, 다메섹에서는 바나바를 통해 선교사역으로 부르시는 예수의 위임을 가리킨다( 26:16-18).

 

(2) 아나니아는 그를 가리켜서 “형제 사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동료 유대인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3)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의 죄를 씻음을 상징한다( 22:16).

 

(4) 아나니아의 안수는 사울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체험한 사건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다(8:17). 안수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 제시된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5)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다라는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구원을 받다라는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는다.

 

(6) 사울의 회심과 그의 성령충만의 체험 사이에는 삼일 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고넬료와 그의 사람들( 10:44-48)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는 그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의 부으심으로 절정에 이른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방문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이방인으로서 이교를 버리고 유대교를 수용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렸다.

 

베드로가 예수를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말했을 때( 10:43), 고넬료와 그의 사람들은 분명히 믿음으로 응답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오순절날 제자들이 받은 것과 유사한 성령의 특별한 부음을 체험했다(11:17; 15:8, 9).

 

(1) 어떤 오순절주의자는 이 이방인들이 베드로의 방문 전에 구원받았다는 견해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i) 베드로는 그들을 회개나 회심에로 부르지 않았다. (ii) 전도자 빌립이 가이사랴에 살았으며(8:40; 21:8), 혹은 다른 전도자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iii) 그들은 이미 예수의 기름부음 받은 사역의 기초에 관해 알고 있었다(10:37, 38).

 

(2) 어떤 오순절주의자는 가이사랴 사람들이 통합된 체험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 두 체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둘 사이에 분별할 수 있는 시간 간격이 없음을 의미한다. 가이사랴의 새 신자들의 성령체험은 사마리아인들이나 사울의 체험과는 달리 사실상 그들의 구원 체험과 동시적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에베소 사람들( 19:1-7)

 

에베소서의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서로 연관된 중요한 질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 바울이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누구의 제자였는가? 예수의 제자였는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가? (2)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 무슨 의미였는가? 우리는 누가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술하면서 바울의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제시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1) 그들은 누구의 제자들이었는가?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어떤 제자들(19:1)을 발견했다. 어느 학자는 누가가 “어떤”(티나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한다. 어떤 번역본에서는 이 단어를 특정한으로 번역함으로써 의미상 혼동을 불러오게 한다. 누가는 확실히 제자 아나니아, 도르가, 디모데 - 에 관해서 말할 때 이 단어의 단수형을 사용한다( 9:10, 36; 16:1). 누가가 “어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19 7절에 나오는데, 이 구절은 열두 사람 정도(호세이) 있었다고 말한다. 누가는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에서 바울은 소그룹의 제자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4)

 

그럼 그들은 누구의 제자들이었는가? 아래와 같이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1) 그들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이었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바울의 첫 번째 질문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오순절 이전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중생했으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지는 못했다.5)

 

(2) 이 제자들의 상태는 아볼로의 상태와 비교되는데( 18:24-28), 그는 믿는 자로서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18:25).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 18:26). 그는 지도가 더 필요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에베소 사람들도 그러했다.

 

(3) 어떤 제자들(티네스 마데타이)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킬지라도(9:10; 16:1)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6)라고 후속성의 개념을 거부하는 막스 터너(Max Turner)가 주장한다. 이 해석은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4) 그들은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제한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제자라고 불린 사람들이었지만 기독교 교리의 이해 측면에서는 심각한 약점을 보여준 사람들7)이었다.

 

(5)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8)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임스 던(James Dunn)은 동의하면서 성령이 배제된 제자직은 용어상 모순이라는 것이 자명하다9)고 한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그들의 완전한 무지가 그들의 제자직의 상태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10)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세례와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6) 그들은 단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을 뿐이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고 한다.11) 그들은 예수에게 실제로 한 번도 헌신한 적이 없는 분리파 교도12)였다. 이 사람들은 참으로 중생한 자들이 아니다.13)

 

제자라는 단어는 사도행전에 30회 나오는데 이 단어는 항상 예수의 제자를 의미한다. (유일한 예외는 9 25절인데, 거기에서 이 단어는 바울의 제자들이라는 의미로 “그의”라는 말에 의해서 한정된다.) 누가가 19 1절에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하던 이 단어의 일관된 의미를 벗어날 이유는 없다.

 

(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에는 두 개의 동사 형태의 시제 받았다(에라베테)믿고 있다(피스튜산테스)가 있다. 여기에서 받았다는 단어는 이 문장의 주동사이고, 믿고 있다는 단어는 부정과거 분사로서 그 행동이 주동사의 행동과 관련을 맺는다. 문법적으로 볼 때 “너희가 받았느냐”는 말이 “믿을 때에”와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믿음에 후속된 시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믿음과 받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이 받음에 선행하는가?

 

동시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너희가 믿을 때에라는 번역을 선호한다. 에프 에프 부르스(F. F. Bruce)는 동시 발생이라는 생각이 교리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14) 다른 사람들은 선행설을 주장해서 너희가 믿은 후에/이후에라는 의미로 읽는 것을 선호한다.15) 스텐리 홀톤(Stanley M. Horton)은 성경에서 부정과거 분사가 주동사의 행동에 앞선 행동이라고 주장한다.16) 제임스 던(James Dunn)은 오순절주의자인 동료 학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 분사(믿었다)너희가 믿은 후에로 번역되는 것이 가능하다17)는 결론을 내린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동일한 헬라어 문법 구조가 이 구절에서 두 번 더 나타난다. 각 경우에 있어서 그 분사의 행동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사람들은 들은 후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19:5). 바울이 안수한 후에 성령은 그들에게 임했다(19:6).

 

그러므로 문맥이 최선의 답변을 제공한다. 바울이 질문한 요지는 성령체험을 의미하는데(19:6), 이 경우에 바울의 안수에 의해서 나타났으며, 앞서 경험한 신자들의 것과 유사한 외적 현상들이 수반되었다(2:4; 10:46). 에베소인들의 성령체험(19:6)은 그들의 구원과 동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바울이 질문을 통해서 그들의 구원의 진정성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확신할지라도 이 성령체험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그들의 세례와 바울의 안수에 뒤따른 것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그들이 사마리아나 가이사랴의 신자들과 비교될 만한 성령체험을 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3)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도행전 19 2절의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에베소인들의 답변을 볼 때 우리의 논평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요한의 선언을 포함해서 요한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타나신 성령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반응에 대해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사한 진술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가 생수의 강에 관해서 약속하셨을 때 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설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39).

 

이 사건이 오순절날 이후 대략 25년 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오순절 체험이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 날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요약

 

성령으로 세례받는 체험은 중생의 체험과 구별되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은 두 단계의 구원의 과정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순절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의 순간에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8:9; 고전 6:19), 성령세례는 그분의 사역을 위한 능력부음의 구별되는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다섯 가지 경우 중 네 가지(예루살렘, 사마리아, 다메섹, 에베소)에 있어서 성령체험을 한 사람은 이미 신자였다. 예루살렘에서 은혜를 입은 자들은 비록 그들이 거듭난 시점을 정확히 알아내기란 어렵지만(또는 불필요할지라도)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였다. 네 가지 경우에 회심과 성령세례 받음 사이에 분명한 시간 간격이 있었다. 그런데 가이사랴의 경우에서는 그 체험이 고넬료와 그 집안사람들의 구원의 믿음과 사실상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4. 성령세례의 결과

 

성령세례를 받으면 증거를 위한 능력부여가 나타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이 후에 성령의 역사가 다섯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방언으로 나타난다. 오순절날에 모인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2:4). 둘째, 복음증거로 나타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 4:8, 31; 참조 2:14). 셋째, 권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복음증거를 방해하는 악한 자를 꾸짖고 고통을 주었다( 13:9). 넷째,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며( 1:15), 바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9:17). 다섯째, 예언으로 나타난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의 예수 잉태에 대해 예언했으며( 1:41), 사가랴는 성령충만을 받아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예언했다( 1:67).

 

5. 성령세례의 체험

 

(1)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성령의 흘러넘치는 충만을 체험하게 된다( 7:37-39). 성령세례는 성도가 성령 안에 완전히 잠기는 체험을 말하며, 성령충만은 성령이 생수의 강처럼 마음에 넘치게 되는 체험이다. 생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인 것처럼, 성령은 갈급한 심령 속에 풍성한 생명력으로 역사하게 된다. 성령충만 받은 신자들은 성령으로 완전히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 성령충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의 삶을 지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2)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이 생긴다( 2:43). 성도들이 능력을 받게 되고 수반되는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게 되니, 성령의 임재 앞에 경외심이 커지게 된다. 경외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재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갖게 한다.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3)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강한 거룩함을 추구하게 되고 그의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2:42). 성령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시며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은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삶이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때 성령으로 감동되고 인도되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을 유발하게 된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 즉 자신을 희생하고 복음전도에 온 몸과 마음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다.

 

(4)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위한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사랑을 갖게 된다( 16:20).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하셨으며(10:45; 20:28; 26:28; 10:11), 제자들에게도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을 하라고 가르치셨다(22:49; 10:45; 12:32; 15:1-32; 19:10; 3:16). 예수의 말씀은 죄인과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6:26-30; 10:29; 10:30; 13:11; 12:4-12; 21:18). 성령충만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복음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될 것이다.

 

6.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수는 승천하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남아서 많은 시간을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렸으며, 며칠 후에 성령충만을 받았다( 2:4).

 

어떤 신자는 성령세례를 즉시 받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왜 그럴까?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하심에 맡기기 위해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성령의 임재는 기다리는 의미 있는 시간 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갈망하는 신자는 기다림의 시간이 성령충만을 부어주심에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신자의 삶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자가 해야 하는 한 가지는 성령세례를 구하기보다는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은 예수이다. 갈망하는 신자는 그러한 체험보다는 예수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갈망하는 신자는 성령께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오는 현상들은 성령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러나 항상 강조해야 하는 점은 감정적 체험보다는 내면의 충만이다. 감정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반대되는 것이다. 갈망하는 마음이 성령의 내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행한다면 도움이 된다. (1)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이해해야 한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받아야 한다. 선물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거나 또는 무엇을 잘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은 오직 열린 마음과 자발적인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 (2) 성령세례는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옳은 것임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3) 당신의 삶에서 기억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로운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4) 찬양과 경배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5) 주님께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6) 당신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에 순종하고, 그 내적 솟음이 당신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말이지만 하나님께는 의미 있는 말이므로 예배, 찬양 그리고 경배를 표현하도록 허용한다.

 

 

 

연구문제

 

1. 성령세례의 용어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모두 같은 뜻인가?

2. 성령세례는 신자가 경험하는 것인가? 혹은 새신자가 경험하는 것인가?

3. 중생의 체험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어떻게 다른가?

4. 성령세례의 결과는 무엇인가?

5. 당신의 성령세례의 체험은 어떠한 것이었나?

6.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무엇이 특징적으로 다른가?

7. 요한복음 14-16장에 있는 보혜사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대조할 수 있나?